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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의 생각

사라짐의 미학

허윤희는 목탄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의 드로잉은 수없이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지움이란 곧 비움으로써 또 다른 것을 다시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하지만 지움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지진 못한다. 종이를 누르고 지나간 목탄 무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 또한 사라진 듯 하여도, 어디엔가 삶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 위에 새로운 기억들이 쌓이고 지워지고, 또 쌓이고 지워지고… 지난한 지움의 과정 속에 사람들은 그렇게 저마다 세월의 경험치를 안고 살아간다.

벽으로 확장된 그의 드로잉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 속에 다시 사라져야 할 필연을 지닌다. 드로잉의 과정과 그 흔적을 영상을 통해 남긴다 해도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대상의 부재를 더욱 부각시킬 따름이다. 그가 떠나 보내야 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탓일까. 아니면 그 그림이 곧 지워져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의 그림 앞에서 마음은 더욱더 애잔하고 보고 있어도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자세를 감지한다면, 곧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잡고 싶고 영원히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니면 잊고 싶어도 쉬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순간을 고통스럽지 않게 물 흐르듯 흘러 보낼 수 있는 인내와 평정심을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허무와 냉소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그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 사라짐에 대한 통찰과 부단한 비움(지움)의 행위를 통해 허윤희는 어느 때보다 삶의 의욕과 예술의 열정으로 충만해 있는 듯하다.

그와의 첫 대면 후 3년… 그는 많이 밝아진 것 같다. 아마도 고국에 돌아와 안착하면서 타국에서의 고된 삶에 대한 상처가 많이 치유된 터, 작가는 좀더 여유로워지고 성숙한 듯하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경험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충실했다면 지금은 외부의 목소리와 타인에 대한 관심도 수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자연은 더 이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그의 일상이 되었다.

한 잎의 생각

그는 수줍은 듯 제목을 말했고, 나는 듣는 순간 그렇게 마음을 정해버렸다. “한 잎의 생각”

그는 북악산 인근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나뭇잎, 솔방울들을 주워 모으다가 그것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산책하고 수집하고 글을 쓰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는 명상 속에 잠기곤 한다. <나뭇잎 일기>로 명명된 그의 작업은 나뭇잎 한 잎과 그 날의 자연에 대한 느낌 몇 줄로 매일매일 한 장의 노트가 채워진다.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잎사귀가 모여 큰 자연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도시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생각에 이르러 자연에 대한 글은 사람에 관한 글로 옮겨간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사람, 그날 만났던 사람, 문득 떠오른 어떤 사람… 하루에 한 사람씩 그의 드로잉이 된다.
그는 “한 잎의 생각”에서도 벽에 목탄 드로잉을 선보인다. 전시장 한쪽 벽에 사람과 나뭇잎, 그리고 도시 풍경이 그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아직 그 작품을 보지 못했다.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그 신선한 모습을 드러낼 테니, 지금은 다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짐작할 뿐이다. 모든 것을 치밀하게 구상했다 하더라도 그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작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 순간의 기분과 체력, 그 공간의 공기와 포용력이 한데 섞여 작업을 이뤄낸다. 현장 작업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한 잎의 생각”은 그의 희망찬 교향곡 같다. 자연 속 나뭇잎들이 속삭인다. 잔디 한 잎, 아카시아 한 잎, 플라타너스 한 잎, 솔 한 잎, 버들 한 잎, 한 잎, 한 잎, 한 잎… 더불어 도시 속 빌딩숲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햇살을 받아 아롱거린다. 어느 하루는 나뭇잎과 함께, 또 하루는 사람과 함께, 그렇게 둘 사이에서 작가는 생(生)의 행복을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다. 예술에 온통 심취하여 눈을 반짝이며 작업을 설명하던 그의 모습이 삼삼하다.

정나영 / SOMA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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